The Black Borderline1)
A text-collage cut and glued by Christian Schweitzer
"나는 세상의 현실을 좋아한다. 그러나
환타지를 내재하지 않은 현실은 좋아하지
않는다. - 현실과 환타지는
서로 긴밀히 짜 맞추어져 있다. 삶 또한 그렇지
않을까? 인간의 반응과 감정은?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사고와 자신만의
행위를
갖고 있다." Friederich Wilhelm Murnau
아마도 이것은 또한 가변적 원리일 것이다. 즉 그 안에서는 어떠한 것들은 진보하며 시험되어질 것이다: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원리, 항상 발전을 향해 열려 있는 길. 이 원리는, 예술/건축학교 형식의 비 물리적 측면들이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적으로 이동할 수 있어 더 이상의 네트워크가 필요치 않게 되는 것으로 설명되어 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인프라스트럭처와
조정업무들은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다른 장소로 이동될 수 있거나, 또는 기생체처럼 기존해 있는 인스티튜션에 도킹함으로써
연합효과가 발생 될 수 있다. 즉 하나의 유목적인 기관인 것이다.
도시 안에서 이 아카데미의 유일한 고정 장소는 아마도 가장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접근이 용이한 안내소와 같은 곳이 될
것이다. 이 안내소는 주소나 전화번호 또는 웹사이트 중 단 한가지만을 소유하게 되면 동시에 아카데미로써 기능하게 된다. 더욱이
웹사이트는 유일한 (물리적)장소마저도 불필요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면, 상황의 특정한 선택과 아카데미가 원하는 공간과 도시의
선택이 가능하게 된다. 아마도 상황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시나리오의 선택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하나의 상황은 시간
안에서 하나의 점의 형태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와는 달리 시나리오는 각각의 기간에 따라 가변적으로 전개된다. 시나리오는
학생식당과 같은 공간이다: 만남의 연결 장소. 이 학생식당과 같은 시나리오에 대한 책임은 각각의 학생에게 있다. 고정된 장소성의
해체와 가변적 콘텍스트는 동시에 지금 도킹되어 있는 장소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불러일으킨다. 지금 장소와의 대면은 [순천] 또는
라틴 아메리카의 한 슬럼가와의 그것과는 다르다. 장소에 대한 책임감이 강할수록, 이 책임감은 장소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갖게
한다.2)
"한 존재의 존재하기 위한 유일한 이유는 존재 자체이다. 그것은 살아있어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식물은 움직이지 않아도 살아 있을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자양물을 직접 토양에서 얻는다. 그리고 그들의 무생물성은 태양에너지
덕분에 그들 방식대로 살아있는 생물체로 전이된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은, 그 전에 이미 식물에 의해 변환되어진 태양에너지를
소비함으로써만이 삶을 유지 할 수 있다. 이들은 이동성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이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움직이는 것에 주력한다.
이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은 신경체계를 필요로 한다. 이 신경체계는 환경에 영향을 주거나 거꾸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을 허락한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같은 이유를 위해 ... 생존. 그 행동이 효과를 발할 경우, 기분 좋은 감동이 결과로
이어진다.
뇌의 기능은 사고가 아니라 행동이다.
진화는 보호론자이다. 우리는 동물의 뇌에서 매우 원시적인 형상을 보게 된다. 이것은 ‘최초의 뇌’이다. 폴 맥린(Paul
MacLean)은 이것을 파충류의 뇌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것은 맞는 표현이다.
이 ‘최초의 뇌’는 즉각적으로 생존을 위한 반사작용을 유발한다. 동물은 이 생존을 위한 반사작용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
마시고 먹는 것으로 동물의 구조체계는 유지된다. 그리고 교미함으로써 번식한다. 다음으로 우리가 포유동물의 경우, ‘최초의 뇌’와
더불어 ‘두번째 뇌’를 볼 수 있다. 폴 맥린(Paul MacLean)과 다른 학자들은 그것을 감정의 뇌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기억의 뇌라고 칭하기를 선호한다. 어떠한 것이 기쁨을 주었고 어떠한 것에 불쾌해 했는가에 대한 기억 없이는 행복,
슬픔, 고민 등이 어떠한 구분도 갖질 않는다. 화를 내는 것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우리는, 하나의 생명체는
행동에 대한 하나의 기억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세번째 뇌’가 위에서 언급된 두 뇌에 덧붙여진다. 이것은
대뇌피질이라고 불린다. 인간의 경우 이 부분은 상당히 발전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연결’한다는 의미로써 연합적인 피질이라고
부른다. 이 뇌 부분은 과거 경험의 흔적을 보유하고 있는 다른 여러 신경회로들을 연결한다. 연합적 피질은, 경험의 순간에 환경
안에서 각인된 것과는 다르게 과거의 경험들을 연결한다. 그럼으로써, 연합적 피질은 우리가 창조적이며 상상력을 소유할 수 있게
한다. 인간에게 이 세 부류의 뇌는 여전히 존재하며, 서로 겹쳐져 있다. (...)
뇌의 이 세 층은 항상 함께 작용하여야 한다. 그러기위해 이들은 신경속(束)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어떤 신경속은
보상기제(reward mechanism)라고, 또 어떤 신경속은 처벌기제(punishment mechanism)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처벌기제의 신경속은 우리를 도주하게 하거나 저항하도록 한다. 세 번째 신경 속은 행동의 억제를 유발한다.
(...)
그러나 한 인간의 출생 당시 뇌는 여전히 미숙한 상태임을 인지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존재하기 시작하여 처음 2-3년 동안에 겪게
되는, 인간으로서의 경험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 경험은 앞으로의 행동방식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출생과 동시에, 아마도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부터, 우리의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우리가 느끼는 자극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온다는 것을 우리는 인지하여야 한다. 우리가 바로 그 ‘다른 사람들’이다. 즉 우리가 죽게 되면,
우리의 신경계에 내면화 된 이 다른 사람들, 우리를 형성시켰으며, 우리 뇌의 형식을 만들고 가득 채운 이 다른 사람들 또한 죽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세 가지 뇌는 항상 활동 중이다. 처음의 두 뇌 부분은 의식의 차원 밑에서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 이 두 뇌
부분은 사회적 관습에 대한 반사작용을 가동시킨다. 세번째 뇌는 앞의 두 뇌가 무의식적으로 행한 것에 대한 근거, 용서, 변명
등을 위한 설명적 언어들을 공급한다. 우리는 무의식을 심원한 바다 속과 비교할 수 있다.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파도의
최고점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바다의 가장 외부의 피상적인 부분이며, 바람에 의해 타격을 받는다.
우리는 네가지의 주요 행동방식을 구별할 수 있다. 1) 욕구충족행동: 기본적 욕구를 충족하려는 행동 2) 만족행동: 어떤 행동의
결과에 만족을 느낌으로써, 그 행동을 계속 반복하려는 행동 3) 처벌에 대한 행동: 도망침으로써 그 상황을 피하거나, 맞서
싸우면서 공격인자를 소멸시키는 행동 4)억제행동: 행동의 움츠림. 우리가 긴장된 상태로 있을 때, 이 긴장된 상황은 고통으로
향한다. 고통은 이 상황을 지배하는 인자로 역할 한다."3)
"건축은 하나의 정신적 체계이다. 그것은 지음(build)을 통해 현실화 된다.
건축 - 끝없는 세상 위에 지어지는 하나의 관념, 인간의 정신적 힘을 표명하는, 자신의 운명과 삶의 물질화 된 형태와 표현.
건축의 기원으로부터 금세까지 그것의 본질과 의미는 변화하지 않았다. 지음(build)은 인간의 기본욕구이다. 그것은 보호를 위한
지붕의 구축을 우선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크라 공간의 형성과 인간 활동의 중심을 표식 하였다 - 도시의 시작.
모든 지음의 과정은 제의식이다.
건축 - 인간 자신의 표현 - 육체와 정신의 동시성.
건축은 근본적이며, 감각적이며, 원시적이며, 잔학하며, 끔찍하며, 강력하며, 지배적이다.
동시에 건축은 가장 미세한 감정의 형체화이며, 가장 섬세한 흥분의 감정적 기록이며, 영혼의 물질화이다.
건축은 평범한 부류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며, 대중의 작은 행운을 위한 것도 아니다. 건축은 그 문화와 문명의 최고의
차원에 있는, 그들 시대의 꼭대기에 서 있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건축은 엘리트들의 일이다.
건축 - 공간 - 은 지음의 방법으로 결정된다. 건축은 공간을 제어한다. 그것은 높이를 겨냥하며, 땅을 파헤침으로써, 대지위로
광대히 돌출하여 흔들거리며,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감으로써 공간을 제어한다. 닫힘과 열림으로 제어한다. 공간으로 공간을
제어한다."4)
"한 마리의 쥐가, 문이 있는 칸막이에 의해 두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는 우리안에 있다. 두 공간의 바닥에는 서로 다른 시기에
전기가 흐르도록 설치되어 있다. 바닥에 전류가 흐르기 전에, 4초 후에는 전기 충격이 올 것이라는 것을 신호를 사용하여 쥐에게
경고한다. 쥐는 처음에는 이 경고 신호를 알아 체지 못한다. 쥐는 매우 빠르게 이 프로세스를 익히지만,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열려져 있는 문을 발견하고 그 문을 통과하여 전기가 흐르지 않는 옆의 방으로 이동한다. 몇 초
후 같은 실험 프로세스를 반복한다. 다시 그는 자신이 배워야 할 것들을 신속히 익힌다. 즉, 그는 처음의 방으로 돌아감으로써
전기충격의 가해를 피한다. 쥐는 7일 동안 하루에 10분씩 이 실험을 겪었다. 7일 후 이 쥐는 여전히 건강한 상태였다. 털에는
윤기가 흘렀으며, 혈압도 정상이였다. 그는 탈출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처벌을 피했다. 이것은 쥐에게 만족스러운 경험이였다. 그는
자신의 생물학적 균형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안의 쥐에게는 쉬었던 이 문제 극복을 위한 행동들은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떠한 욕구들은
벌써 유아기부터 이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 도망가는 것이 별 효과가 없을 경우 저항함으로써 이러한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목표를 갖던 동일한 목표를 갖고 있던 그들은 그 목표를 달성하는 동안 경쟁한다. 그리고
결국에 한 명은 승자이며, 다른 한 명은 패자이다. 이 상황의 결과는 어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보다 우세하다는 것이다. 한
공간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 - 우리는 그것을 텃세권이라고 부른다 - 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동기는 무의식적이지만, 모든 인간
행동의 근원이다. 소유하고자 하는 본능도 지배하고자 하는 본능도 존재하지 않는다. 각 개인의 신경체계는 다른 사람들도 소유하기를
열망하는 어떤 대상물이나 어떤 한 사람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간직하여야 하는 필요성을 배운다. 그리고 그는 이 대상물이나 이
사람을 항상 자기 곁에 두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지배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배운다.
이미 언급되었듯이 우리는‘다른 사람들’이다. (...) 백 만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축적된 경험들은 언어를 통해 다음 세대에게
전해지는 것이 가능하다. 한 개인이 자신의 생존을 자신이 보장하는 시대는 벌써 오래 전에 지나갔다. 살기 위해 이제 그는 다른
것들이 필요하다. 그는 모든 것을 알지도, 할 수도 없다. 생존집단은 더 어린 세대에게 사회 안에서 살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들을 가르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그에게 바지를 오물로 더럽히지 말라고 가르친다 (...). 그 다음 신속히 우리는
아이들에게 집단의 결속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해동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에게 무엇이 아름다운지, 무엇이
좋은 것이지, 무엇이 추한 것인지를 가르친다. 우리는 그에게 그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 지를 말하고, 그의 행동에 따라 처벌이나
보상을 한다. 아이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상관이 없다. 그의 행동이 생존을 위한 집단의 요구들에 순응하는지 않은지에 따라 처벌
또는 보상을 받는 것이다."5)
"이러한 건축은 미(美)를 관건으로 삼지 않는다. 우리가 미(美)를 원한다면, 그것은 형태나 비례의 미(美)보다는 근본적인 것의
감각적인 미(美)이다.
한 건축물의 형체는 어떤 목적을 갖는 물리적 조건으로부터 발전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건축물은 자신의 사용용도를 나타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조직과 구조의 표현도 아니며, 울타리도 피난처도 아니다.
하나의 건축물은 자신의 그 자체이다.
건축은 어떠한 목적도 지향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지어 놓은 것은 스스로 그들의 유용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형태는 기능을 따르지 않는다. 형태는 그 자체로부터 스스로 생겨난 것도 아니다. 한 건물이 입방체가 되거나, 피라미드 형태 또는
구형이 되는 것은 인간의 중대한 결정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건축에서의 형태는 개인에 의해 결정되어지고 지어진 형태이다.
오늘날,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이 시대의 현저히 발달 된 과학과 완벽한 기술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지을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제공하며, 가능한 기술에 의해 결정되는 건축이 아닌, 그 자체를 위해 기술을 이용하는 건축이 가능하다 - 그
자체의, 절대적 건축."6)
"우리는 이제 겨우 우리의 신경계가 어떻게 기능하는 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지난 이삼십 년 사이에서야 신경계의 기본 구성요소인
화학분자로부터 생겨나는 시스템이 어떻게 사회상황에 의해 프로그램 되어지고 주입되어지는 신경회로를 만들어 내는지 알게 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무의식 메커니즘 안에서 발생한다. 즉 우리의 충동과 문화적 자동성들은 언어와 논리의 가면 뒤에 숨겨져 있다.
언어는 단지 지배의 근거를 은닉하는 수단이며, 이 지배를 이끄는 메커니즘을 숨기는 수단이다. 그리고 언어는 한 개인이 집단작업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 만족한다는 것을 그 자신에게 확신시키는 수단이다. 그러나 보통 그가 하는 모든 것들은 위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 위계 상황은 언어적 알리바이 뒤에 숨어있다: 변명과도 같이 언어로 치장된 알리바이.
두 번째 실험에서는 두 방 사이가 닫혀있다. 쥐는 도망갈 수가 없다. 그는 피할 수 없는 처벌을 겪게 된다. 이 처벌은 억제행동
방식을 유발한다. 쥐는 그의 모든 행동이 무의미하며, 탈출할 수도 맞서 싸울 수도 없다는 것을 배운다. 그는 노력하기를 멈춘다.
이와 같은 억제는 인간의 경우에도 ‘고통’을 수반하며, 심각한 생물학적 장애를 가져온다. 보통은 세균이 침투하면 그것을 싸워
없앨 수 있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어 세균에 감염 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 장애는 심각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퇴치했을
하나의 암성의 세포가 이제는 암으로 발전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물학적 문제들은 ‘문명적’ 또는 신경성이라 불리는 병들을
유발한다."7)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는 건축을 원한다! 피 흘리는, 지칠 대로 지쳐있는 건축, 또는 망가져있는 건축도 괜찮을 것이다.
불타는, 찌르는, 비탄에 빠진, 잡아당겨 찢기는 건축. 건축은 험난하며, 불타오르며, 매끄러우며, 딱딱하며, 모나있으며,
잔인하며, 둥글며, 부드러우며, 다채로우며, 외설스러우며, 몽상적이며, 꿰매어 붙이며, 서로 떨어뜨리며, 축축하며, 건조하며
그리고 심장마비와도 같아야 할 것이다. 죽음과 삶. 만약 건축이 차갑다면 얼음 덩어리처럼 차가워야 하며, 만약 건축이 뜨겁다면
불꽃처럼 뜨거워야 한다. 건축은 불타올라야 한다."8)
"세번째 실험에서도 쥐는 탈출할 수 없다. 그는 동일한 처벌을 받게 되지만, 대항자로서의 다른 쥐와 함께 있다. 그리고 그는 이
다른 쥐와 싸울 수 있다. 그는 여전히 처벌을 받고 있지만,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신경계는 행동을 위한 것이다. 두 번째
실험의 결과와는 달리 이 쥐에게는 병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 쥐는 동일한 처벌을 받은 후에도 매우 건강한 상태였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 사회의 법칙들은 이러한 자기 보호적 폭력을 일반적으로 허락하지 않는다. 한 노동자가 그가 혐오하는 감독관과
맞닥뜨렸을 때 다짜고짜 그의 안면을 후려칠 수는 없다. 그러면 그는 교도소로 끌려 갈 것이다. 그는 도망칠 수도 없다. 도망치게
되면 일자리를 잃어버린다. 이렇게 매일 매일, 매주 그리고 매달, 때로는 몇 년 동안이나 그의 행동은 억제된다. 이러한 행동의
억제에 대항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있다. 공격성은 절대 아무런 근거 없이 발생하지 않는다. 공격성은 항상 억제되어 있는 다른
행동으로부터 기인한 결과이다. 공격성의 폭발이 유익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신경체계 안에서는 이 상관관계가 쉽게 설명되어
진다. 이미 얘기 되어진 바로, 한 사람이 행동이 억제되어 있는 상황에 있으며 그 상황이 장기적이면, 그 상황은 그의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수반되는 생물학적 장애는 감염증의 출현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 병’으로 불리는 행동을 유발한다. 어떤
사람이 더 이상 다른 사람에 대한 자신의 공격성을 자제할 수 없게 되면, 그는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 한
방법으로는 그 공격성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린다. 그는 신체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생리학적으로 자신의 위를 공격해서
구멍이나 궤양을 일으킨다. (...) 자신의 공격성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다른 방법은 더욱 극단적이다. 그는 자살을 선택한다.
우리가 우리의 공격성을 다른 사람에게 분출시키지 못하면 우리는 그것들을 여전히 우리 자신에게 폭발시킬 수 있다.
무의식은 여전히 만만치 않은 장치이다. 무의식은, 우리가 사회의 처벌 때문에 표현하기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억누르고 있는 모든
것을 껴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회가 보상을 허락한 것 또한, 그리고 출생 이후 우리의 뇌에 자리 잡고 있는 모든 것들을
보관하고 있다. 우리는 무의식의 존재를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우리의 행동들을 이끈다. (프로이드적 무의식이 아닌)
이 무의식은 가장 위험한 존재이다. 우리가 한 개인의 개인성(personality)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치의 평가, 선입견
그리고 다른 진부한 것들로 가득 채워 진 잡동사니 주머니에서 꺼내진 것들로 짜 맞추어져 형성된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갈수록 이
잡동사니들은 더욱 더 완고해지며 갈수록 문제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형성된 견고한 체계[personality]에서
단 하나의 돌이라도 빼게 되면 모든 것은 무너진다. 그 결과는 고통이다. 그리고 고통은 어떠한 것으로도 멈추지 않는다. 살인이나
사회집단 규모의 대량학살 또는 전쟁도 그 고통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메커니즘에 의해, 왜 그리고 어떻게
과거와 현재에서 지배의 위계들이 확립되었는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달에 가기 위해서, 우리는 중력의 법칙을 알아야만 한다.
중력법칙을 아는 것은 우리를 중력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이 원리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행성의 모든 거주자들의 뇌가 어떠한 방식으로 기능하는지, 그들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알기 전까지는,
그리고 항상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동기를 그들이 알게 되기 전까지는 어떠한 것이라도 변화 할 가능성은 희박하다."9)
"현실은 인간을 능가한다. 한 개인은 지금 이 세상의 현실에서 많은 것들을 극복 할 수가 없다. 동시에 어느 누구도
무능력해지기를 원치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들의 무능력을 부인하며 비약된 현실(contra-reality)을 창조해
낸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두 가지의 다른 현실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육체에 항상 지니고 다니는
수많은 동맥이든, 눈이든, 귀이든, 운율이든 이 모든 것들은 600백만 년의 세월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아직 지구가 얼음으로
덮여 있었을 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즉 우리가 사랑에 빠지게 될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될지는‘지금 이 순간’에 결정되어진다. 이렇게 우리는 또 다른 두 삶 안에 존재하고 있다. 즉 우리는 항상 두 가지의 다른 물질
상태와 같은, 오랜 시간의 흐름과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다. 예술[창조적 작업]은 이 두 세계를 잇는 다리(bridge)를
제공한다. 이 다리(bridge)는 이 두 세계의 중요하거나 하찮은 정보들을 서로 연결한다. 이것은 예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예술은 우리의 심연의 근처에서 움직이며, 사고와 정보와 지식의 경계(the black borderline)를 넘어
심연의 나락을 경험하게 한다."10)
"캄캄한 어둠 사이로 나는 너의 세계로 걸어가고 있다. 부러진 나뭇가지는 내가 얘기하는 동안 나를 헛디디게 한다. 단지 네가
그것을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느껴라."11)
published in slow city – suncheon,
pp.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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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korean)
1)발터 벤쟈민(Walter Benjamin)의 전략적 형식을 따르지만, 그의 지성까지 따르고 싶지는 않다. 이 글은 인용구들의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객관적 사실들만을 통해서는 여전히 입증할 수 없는 것들로의 접근 행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오직 읽는 이의 주관적 해석을 통해서만이 그것의 의미 또는 무의가 보여 지는 감성적 콜라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림1: 영화 Mon Oncle d'Amérique (감독 Alan Resnais,
1980)의 프롤로그/에필로그 씬의 포토 콜라쥬.
2)Constant Simenon-Reinhardt의 Kathrin Dennig, Dietrich Pressel,
Christian Schweitzer와의 인터뷰 <Szenario-Akademie
: 시나리오-아카데미> 중에서 발췌하였다. 이 글은 Clementine Deliss가 편집하여 1999년
Vienna/Frankfurt/Bordeaux에서 출간된 <Metronome No. 4-5-6,
Backwards Translation>의 26-33쪽에 실려있다.

그림2: 영화 Mon Oncle d'Amérique (감독 Alan
Resnais,1980)의 포토 콜라쥬.
3)영화 Mon Oncle d'Amérique (My American
Uncle: 감독 by 알롱 레즈나이(Alan Resnais), 1980)중 (Henri Laborit)의
서술 중에서 발췌하였다. 건축가로서의 내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이미지 콜라쥬 방식을 이 글을 쓰는 방식으로 차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언어와 이미지사이의 연결 다리로써의 이 영화가 즉시 생각났다. 많은 레이어중의 한 층처럼, 다시 말하면 콜라쥬의 한
부분처럼, 어리 라보리(프랑스의 신경의학자, 화학자, 철학자)는 이 영화에서 몇 가지의 다른 이야기들 사이에서 행동이론을
설명하고 있다. 영화 Mon Oncle d'Amérique은 두말 할 필요 없이 영화적 명작이다. 이 작품은 영화와 영화제작의
방법들을 최극도로 응축하는 방식으로까지 이용하였다. 내레이션의 다섯 아니 그 보다 더 다양한 형식들은 서로 엮어져 이미지와
이야기의 콜라쥬 형식을 만들어내며 서로를 더 풍부하게 하며 각각의 진실들을 드러나게 한다.
4)1963년 5월 Vienna St. Stephan 갤러리의 전시 카탈로그 <Architektur.
Work in Progress : 건축. 프로세스중의 작업> 중 한스 홀라인(Hans
Hollein)과 발터 피힐러(Walter Pichler)의 글 <Architektur :
건축>에서 발췌하였다. 이 글은 1963년 8월 <arts &
architecture>에
재출간되었다. 1960년대 초 비엔나에서는 모던이즘 물결이 시작된 이래로 가장 급진적이고 사변적인 예술과 건축 개념들이
제안되었다. 그 동기는 매우 여러 가지이지만, 독재정권을 막 극복한 그 시대의 상황과는 별개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럽의
1920년대 또는 1980년대의 스페인에서처럼, 이것은 사회의 해방이 짧은 과도기의 기간을 거친 후 미래에 대한 정신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현재 동구권 나라에서 보고되고 있다.
5)ibid. 어리 라보리(Henri Laborit) 1980년. 모던 라이프의 부조리에 관한 쟉 타티(Jacques
Tati)의 1958년 영화 <Mon Oncle>부터 완전한 인간적 존재의 불가능성에 관한 알롱
레즈나이(Alan Resnais)의 영화 <Mon Oncle d'Amérique>까지 사이에는 아주
작은 차이점만이 있다. 제목의 유사성은 아마도 우연이지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삶의 모든 영향력과
함께 그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사회를 형성한다. 인간이 찰나동안이나마 그 사회너머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그의
창조성이다.
6)ibid. 한스 홀라인(Hans Hollein)과 발터 피힐러(Walter Pichler) 1963년. 이 텍스트가 이미
40년 이상 전에 쓰였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제목 <Hyper-polis III: Vision and
Utopia>아래 sa summer workshop 2007을 위한 서문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상상한다.
7)ibid. 어리 라보리(Henri Laborit) 1980년. 나에게 영화는, 그것의 결과로써가 아니라 그것의 형성 과정에
관하여, 건축과 가장 근접한 창조적 표현의 형식이다. CIAM (Congrès International des
Architectes Modernes)이 라 싸라스(La Sarraz)에서 결성되고 나서 일 년 후인 1929년, 정확히 같은
도시에서 CICIM (Congrès International des Cinéastes Indépendents Modernes)이
구성된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니다. 두 그룹의 많은 구성원들이 서로 가까운 친구이며, 유럽의 건축과 영화의 아방가르드를
추구한다는 그들의 목표가 매우 유사함을 보이지만, 그들의 아방가르드 개념 자체는 완전히 다르다. 영화인들은 독립 매체로써의
영화를 선언하며 영화산업(체)을 거부한다는 뜻을 주장하는 반면, 건축가들은 그들의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건축 산업(체)로의
접근을 신중히 찾고 있었다. 산업(체)과의 이 결탁은 아마 역사상 가장 큰 실수였으며, 건축은 오늘날까지도 그것에 고통 받고
있다. 이 결탁으로 갑자기 ‘동기’가 지배적인 관건이 되어 갔으며, 이 후로 순수한 자율적 창조 행위는 거부되었다. 그 전에는
독립적인 창조적 프로세스였던 건축이, 이제는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으로써의 그의 신뢰성을 거의 잃어버리게 되었다. 영화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예술로써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지만, 건축은 그렇지 않다.
8)1980년 그라쯔(Graz)에서 발간된 콥 힘멜블라우(Coop Himmelb(l)au : 볼프 프릭스(Wolf D.
Prix)와 헬무트 슈비친스키(Helmut Swiczinsky))의 마니페스트에서 발췌하였다. 이 글은 1983년
슈트트가르트(Stuttgart)에서 <Coop Himmelb(l)au: Architektur
ist jetzt : 건축은 지금이다> 중에 재 발간되었다. 이 유명한 글은 1960년대 초
오스트리아 건축 담론의 특수한 전후 관계와 함께 이해되어져야할 것이다.
9)ibid. 어리 라보리(Henri Laborit) 1980년. sa summer workshop 2006에 대한 논평을
요구받은 것은 나에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sa workshop은, 그들의 강함 그리고 그들의 약함을 갖는 한국
건축 담론들과 한국 건축 교육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이다. 그것에 대한 논평은 한국 건축 자체에 대한 논평을 의미하게 된다.
여행자로서가 아닌 일 년 이상 이곳에서 지내온 유럽인으로서, 나는 할 말을 잃을 정도의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 시간(시간 그
자체, 내구성, 지구력)에 대한 인식과 직면하고 있다. 나는 항상 과장이라고 믿었던 원리, 즉 콜하스(Koolhaas)가
<generic
city>에 대하여 또는 애론 벳츠키(Aaron Betzky)가 <urban
sprawl>이
에 대하여 말하였던 것들을 이제야 이곳에서 이해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나는 이론가이기보다는 너무 건축가적 인가 보다. 나는 아직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내포하는 것과 그 귀결들을 이성화 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느낄 수 있으며, 그것들은
나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10)2006년 7월 비엔나 <profil> 30호
104-106쪽 알렉산더 클루게(Alexander Kluge
:영화예술가, 작가, 발행인)의 <Das Zwerchfell ist ein Partisan
unserer Gefühle> 중에서 발췌하였다. <The
Blind Director>로 알려진 그의 1985년 영화 <Der
Angriff der Gegenwart auf die übrige Zeit : 다른 시간에 대한 현재의 공격>은
영화 기술의 사용방법상 알롱 레즈나이(Alan Resnais)의 <Mon Oncle
d'Amérique>과 매우 인상적인 유사성을 보인다.
11) 2003년 Radiohead의 앨범 <Hail to the thief>
안의 Thom
Yorke가 쓴 <There there> 텍스트 중에서
발췌하였다. 나는 이 노래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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